전 여자 친구의 아버지 남녀

설을 맞아 여기저기 형님들 누님들에게 전화를 했다. 대부분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느라 바쁜 듯 했다. 오래 통화 하지는 못하고 그냥 맛배기로만 해도 한 시간이 넘었다. 설에 한 번, 추석에 한 번 밖에 안 하는 전화지만 그래도 반겨주시니 나도 좋았다. 특히 군대 간부들이 꽤 좋아했다. 제대한지 1년 반이 지났는데 계속 전화하니까 잘 받아주셨다. 그러고보면 일 때문에 힘든거지 사람 자체는 다들 좋다. 군대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니 만큼 하는 만큼 따라온다. '제일 전화 안 할 것 같은 놈이 계속 전화한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

전화를 하다보니 배터리가 나가서 교환하려고 배터리를 찾았다. 거실에 있길래 배터리를 바꾸는데 어머니께서

'뭐한다고 전화에 대고 그렇게 말이 많아?'
'설이라서 여기저기 전화 하고 있어요.'
'그래? 혹시 그 분 한테도 전화 드렸냐?'
'누구요?'
'그.. 지금 만나는 애 앞에 만나던 애 부모님 있잖아.'
'아 XX네 부모님이요?'
'그래그래. 전화 드렸어?'
'안 했는데요.'
'아직 안 한 거야 아니면 안 할거야?'
'봐서요.'
'그러지 말고 해라. 항상 했잖아.'
'음.. 알았어요.'

하겠다 말씀드리고 다시 방으로 왔는데 이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몰랐다. 헤어졌지만 항상 전화드렸으니 올해도 해야 할 것 같고, 작년 추석에도 전화를 드렸지만 그 때는 꼬맹이랑 만나는 때가 아니었고 지금은 만나니까 전화를 드리기도 좀 뭐하고, 그렇다고 날 좋게 봐주시던 분인데 또 안 하긴 뭐하고.. 그랬다.


전 여자 친구 아버님과는 참 많이 친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식 사위도 아니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고 아직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관계였지만 그 분과 나는 참 많이 친했다. 친구 아버님은 전형적인 한국형 아버지였다.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일에 모든 것을 쏟다보니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에 항상 미안해하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뚝뚝하고 사근사근함이 없어서 표현을 잘 못하고 직장에서 돌아오면 항상 파김치가 되어 소파에 누워 맥주 한 잔 마시는 모습을 보였으니 친구는 그게 좀 싫었나보다. 게다가 주말에도 출근하는 등 평소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어쩌다 시간이 나면 가족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던걸 전 여자 친구는 생색낸다며 더 싫어했던 것 같다. 때문에 항상 외롭고 고달팠지만 가족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보일 수 없었던 속사정을 가진 아버지였다.

첫 만남은 좀 특이했다. 사귄지 6개월쯤 되었을 때 같이 밥을 먹자며 시간을 내주셨는데 굉장히 피곤해 보이셨다. 쓱 보니까 일이 힘들어서 쉬고 싶지만 딸 남자 친구랍시고 없는 시간 내셔서 피곤한 몸 끌고 나오신 것 같았는데 괜히 내가 더 죄송했다. 그 날 따라 친구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며 그냥 우리끼리 어디 가서 놀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좀 괘씸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자리에서 친구를 타박하면 또 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는 집으로 보내고 아저씨랑 나 둘이서만 사우나를 갔다. 부대 있을 때는 샤워만 했지 목욕을 해본 적은 없다면서 사우나 가자고 우겨댔다. 욕탕에 가서 몸을 담그고 사우나를 하고 목욕탕 의자에 누워 쉬는데 아저씨는 한참을 주무시고 나서야 일어나셨다. 특별히 나눈 대화는 없었는데 아마 그 날 점수를 꽤 많이 딴 것 같았다. 딸만 둘이고 아들은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목욕탕에서 나오고 난 뒤 표정이 좋으셨다. 그 뒤로도 휴가 나오면 꼭 시간 내셔서 저녁도 사주시고 그랬다. 나는 딸 가진 아버지 입장이라면 딸의 남자 친구가 아무리 잘 나고 학벌 좋고 능력 좋고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죄다 도둑놈으로 보일 거라 생각해서 저(低) 자세로 나갔는데 그것도 잘 먹힌 것 같다. 내가 꽤 마음에 드셨는지 키도 작고 왜소한 나를 보고 듬직하다 해주셨고 (대체 어디가!) 시종일관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제대하고 난 뒤에도 핸드폰에 아저씨 번호가 등록이 되어 있었고 가끔 전화 드릴 때 마다 잘 받아주셨다.

다만 아쉽게도 헤어지고 나서는 그 전 만큼 자주 연락을 드리지는 못했고 작년 여름에 한 번, 그리고 추석에 한 번 전화를 드렸다. 그 때 반겨주시면서도 헤어지게 된 원인이 딸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별 때문에 딸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그닥 밝지만은 않았다. 그냥 저냥 이런 저런 이야기하고 오래 나누지는 못했다.


전화기를 들어서 번호를 찾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인사를 드렸다. 예전 보다는 꽤 밝게 받아주셨다. 안부를 여쭙고 새해 인사를 드리자 아저씨도 덕담을 해주셨다. 그러다가,

'그래 올해 졸업이지?'
'네.'
'너무 급하게 마음 갖지 말고 천천히 자리 알아보게나.'
'고맙습니다.'
'음.. 그리고 말인데.. 혹시 만나는 사람은.. 있나?'
'아... 네 있습니다.'
'그런가? 그래.. 잘 만나고.'
'네. 알겠습니다.'

침묵 속에 참 많은 말씀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고 꺼내긴 뭐하고.
그랬다.

오늘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대신 문자로 고맙다는 메세지가 왔다. 답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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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먹보 2012/01/27 00:40 #

    처세술이 좋으신데요!사랑받기 위해 행동하시네요. 목표를 잡아서 꼭 취직되시길 바래요!
  • 검정필통 2012/01/28 00:50 #

    고맙습니다.
  • 제르비난 2012/01/27 08:45 #

    한번씩 검정필통 님 글 읽다보면 처세술 쩌신다능....
    나도 좀 가르쳐 주세요. ㅎㅎㅎ
  • 검정필통 2012/01/28 00:50 #

    과찬이시라능. ㄲㄲ
  • 퍼플 2012/01/27 12:03 #

    잘하셨어요. ^^
  • 검정필통 2012/01/28 00:50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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